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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소격동에서 충정로로 옮기고 나서
이 름 관리자 등록일 2010-03-11 14:15:49 조회수 2333
첨 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보존'과 '재건'

2010년 03월 10일 (수) 16:51:57  조준상 공공미디어연구소 소장  mediaus@mediaus.co.kr  


연구소가 터를 옮긴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첫 둥지였던 곳을 떠나 서대문 충정로로 이동하면서 이런저런 상념이 떠올랐습니다만, 이제야 컴퓨터 자판기를 두들기는 건 순전히 게으름의 소치입니다.

2008년 3월, 연구소는 종로구 소격동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돌아보면, 소격동의 역사적인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정말로 기운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소격동(昭格洞)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전기에 '소격서(昭格署)'라는 관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관청은 도교를 보존하고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하는 등 도교의 의식을 맡아보는 기관이었습니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소격서의 존재 자체는 매우 놀랍기까지 합니다. 적어도 조선시대 전기에는 사상적·이념적 개방성이 상당히 유지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흥미가 더해 역사를 뒤져봤더니 소격서는 16세기 초반에 유신들의 압력에 못 이겨 폐지됐더군요.

연구소는 현 정권이 억압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자유주의 그리고 이에 입각한 시민들의 기본권이라고 얘기해 왔습니다. 정치적 자유주의 핵심은 '듣고 말하고 모일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 권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복지를 누리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이른바 사회적 기본권은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현 정권이 추진해온 언론 자유의 억압과 언론의 장악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전기의 개방성과 다양성을 상징하는 소격서, 그리고 그것에서 유래한 소격동, 그곳에서 보낸 2년여 가까운 세월은 연구소가 보존해야 할 가치들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옮길 터를 물색하다 곳간 사정도 부합해 자리한 서대문 충정로 이곳은 연구소에 어떤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는 공간인 듯합니다. 꿈보다 해몽 격인지 모르겠지만, 충정로(忠正路)는 조선 말기의 충신 민영환의 시호를 본뜬 지명입니다. 흘러가는 시류 속에서 '대의를 잊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것으로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물론, '전통'(전두환)이 1980년대에 일본식 지명 대신에 도입했다는 역사적 유래는, 충정로라는 지명에 '국가(당시 군부독재)에 충성하라'는 불충한 의도가 배어 있음도 잊지 않아야 할 겁니다.

충정로 근처에는 김구 선생의 경교장도 있습니다. 언제 한 번 연구소 식구들과 짬을 내 찬찬히 돌아볼 생각입니다. '뉴라이트' 운운하는 세력들이 김구 선생, 나아가 상하이 임시정부까지도 부정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려오는 '더러운 세상'에서, 늘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켜주는 역사적 장소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됩니다.

밴쿠버 동계 올림픽이 한창인 때, 한국선수단이 선전하자 국가권력, 아니 구체적으론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이 오지랖 넓게 나섰습니다. '한국선수단의 선전은 현 정권의 국정철학이 구현된 결과'라나 뭐라나 이런 식의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참 웃긴다 싶었습니다. 현 정권의 국정철학이 뭔지도 모르겠거니와,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듣고 보고 말하고 모일' 권리를 억압한 게 바로 현 정권이기 때문입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들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을 내는 것을 두고 많은 분석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느끼듯이 그들에게서 '주눅 든'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습니다. 체격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자신만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요즈음 표현으로 '짱'입니다. 많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부터 시작된 한국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전통을 빼놓고서는 분석할 수 없습니다. 자유로운 사고, 주눅 들지 않은 사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등이 없었다면 그들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물론, 여기에 소비자본주의가 반드시 덧붙어야 할 것입니다. 이게 '현 정권의 국정철학 구현의 결과'라는 식의 견강부회보다 더 타당한 분석일지 모르겠습니다.

불행하게도, 현 정권은 이 정치적 자유주의의 전통을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주눅 들지 않는 지금의 청년세대와 현 정권은 정말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표현대로라면 현 정권은 '쩐다 쩔어' 정도가 들어맞습니다. 게다가, 주눅 들지 않는 청년세대는 어느 논문에서도 지적했듯이 "물질적으로는 88만원의 삶을 살면서도 문화적으로는 '명품'을 추구하는 '된장녀' 현상과 같은 모순적 상황에 빠져" 들어 있기도 합니다. 달리 보면,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정신적 혼란을 겪는 이들이 주눅 들지 않는 지금의 청년세대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의 선전은 국정철학의 구현 결과'라는 식의 '쩌는' 인식을 가진 정치권력이 언론을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할지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구두선일지도 모르나, 국내 어느 기업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부인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에 비춰보면, 적어도 언론계에서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성, 공공성을 확대하고 강화시키는 것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언론의 사회성과 공공성을 강화시키는 논의는커녕 정치적 자유주의의 기본인 언론의 자유가 억압받고 정치권력의 방송 장악이 횡행하는 게 대한민국의 슬픈 현주소입니다.

충정로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보존'과 '재건'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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