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아르헨티나와 한판 붙는다. 재미있지 않겠나? ‘16강 신화’ 어쩌고 하는 말에 신경 쓰지 않지만, 그래도 좀 기대된다. 나름대로 응원할 것이다. 이기면 기분 좋겠지만, 져도 상관없다. ‘치맥’을 곁들인, 낯선 이들과 함께 할 집단시청의 즐거움에 설렌다. 오해마시라. 그렇다고 내가 월드컵에 미친 건 아니다. 한국팀 경기이니 보고, 혹 그렇지 않더라도 흥미로운 시합이니 시청하며, 역시 월드컵 게임이라 볼만해 하고 즐겁게 떠드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데 남들은 어떨까?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훨씬 더 축구를 좋아하고 대표팀을 사랑하며 월드컵을 즐기는 이가 있다. 기분 좋게 환상적인 플레이에 푹 빠진다. 그래도 월드컵의 환상에 빠진 사람들은 주변에서 별로 찾지 못한다. 월드컵을 유쾌히 즐기면서 현실을 진지하게 살고, 대표팀을 응원하면서 현실과 치열하게 쟁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내 이웃이다. 또한 월드컵을 즐기는 대다수 시청자, 시민, 대중들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인 내게 어제 읽은 <경향신문> 두개 칼럼은 아무래도 찝찝하고 불쾌하다. 우선 ‘정도언의 마음읽기’라는 글이다. ‘월드컵에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열광하게 하는가?” 열광이라고? 들어보자. “나와 한국 축구가 동일시되는 것이다. 한국 축구가 이기고 있는 순간에 내 인생의 좌절은 보상된다. 지고 있으면 내 인생의 성공은 더 이상 완벽하지 않다.” 음, 정말 그러한가?
참고 따라가 본다.
질문 : ‘우리’는 왜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가?
답 : “한국, 대한민국은 역사상 한 번도 세계의 중심에 서본 적이 없다…한국인의 마음에는 세계의 중심에 서고 싶은 소망이 간절하다. 그래서 우리는 응원을 할 때 절대 ‘한국’이라고 하지 않는다. 늘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허걱!
질문 : 왜 비를 맞으면서도 거리응원에 나서는가?
답 : “그것은 한마디로 ‘큰 나라’에 대한 열정과 소망의 소통과 나눔이다.” 뜨아!!!
또 참고 따라가 본다.
질문 :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 : “열광이 열광으로만 끝난다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다. 환상이 구체적으로 현실화되어야 우리의 소망이 충족될 수 있다…우리가 축구경기에 투자한 열광의 에너지를 어떻게 저장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지금부터 열광의 뒤를 받쳐주어야 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판다스틱한 결론, 환상적인 제언이다.
논거나 논지를 따지기에 앞서, 이런 투와 이런 유의 칼럼을 <경향신문>에서 읽는다는 것은 독자로서 매우 당혹스럽다. <경향신문>이 비판적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보다 샤프하고 현실적인 분석의 글을 실어야 한다. 글쓴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정도 시선으로 현실의 대중이나 대중의 삶과 마주하기는 한 마디로 역부족이다. 그 정도로는 월드컵 대중은 물론이고 <경향신문> 독자들의 비판적 해석능력, 판단능력을 쫓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옆에 실린 월드컵에 관한 또 다른 칼럼, 김민아 칼럼은 어떠한가?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게 제목이다. 뭘 말하려고 하는지 딱 짚인다. 실제로 글의 내용은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는다. ‘월드컵의 신’을 따르고, 박지성의 ‘매혹적인 질주’를 쫓으며, ‘대~한민국!’을 외칠 때 문수스님이 잊혀지고 수경 스님이 사라진다는 메시지다. 골재 재취업 해오던 70대 사장이 목숨을 끊었다고 통보다. MBC 이근행의 해고가 확정되었다는 알림장이다.
전교조 교수와 전공노 공무원들이 또 ‘사회적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는다. 그래서 월드컵이 무섭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월드컵의 열광에 몰입하는 “내가 두렵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름 성찰적인 태도를 취한다. 올바른 태도이지 않은가?. 월드컵을 쫓고 대표팀을 열호하는 “그 사이 또 누군가 죽어갈까봐, 그것도 모른 채 TV 앞에서 넋을 잃고 있을까봐” 자신이 두렵다지 않은가.
앞선 황당한 칼럼과 달리,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톤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울림이 약하고 괜히 기분 나쁜 것은 왜 일까? 동조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혹시 그것은 여전히 첫 번째 칼럼과 마찬가지로 대중과 현실, 월드컵 현상을 일면적으로 바라보거나 피상적으로 해독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전자가 과도한 심리적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른다면, 후자 또한 조급한 주관적 결론으로 빠진 것은 아닌가?
맞다. 월드컵 기간 중에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주의하는 게 옳다. 무엇보다 <경향>을 포함한 자칭 ‘언론’은 죽음의 현실, 폭력의 현실, 선전의 현실을 예리하게 직시해야 한다. 집요하게 그러하고 더욱 그러하시라. 천안함의 진실을 자체적으로 추적하고, 4대강 공사와 수신료 인상의 현실을 일관되게 고발하시라. 월드컵 게임을 즐기면서도 현실을 정확하게 따라잡을 수 있도록 그렇게 서비스하는 게 맞다.
그렇지만 “그것도 모른 채 TV 앞에서 넋을 잃고 있을까봐” 걱정하는 것은, 개인적으로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반 대중의 관점에서는 좀 오버인 것 같다. 최소한 현재적으로 대중들이 월드컵을 즐겨 보고 또 월드컵을 응원한다고 해서 현실을 망각했거나 현실로부터 완전히 눈 돌려버렸다고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내 주변 사람들만 해도 천안함, 4대강, 수신료 인상 또한 월드컵만큼이나 중대한 현실, 명백한 현실이다.
물론 글쓴이는 자기 성찰적이었을 뿐이라고 대꾸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은근히 배어있는 훈계조의 톤, 계몽조의 투를 예리한 독자들은 정확하게 감지하게 된다. 그래서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그랬다. 솔직히 <경향>도 몇 개 지면을 털어 월드컵 기사를 재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경향신문>을 읽는 대중들이 월드컵의 선전, 월드컵의 환상 속으로 쭉 빠져버렸다고 어찌 단정할 수 있는가? 지나친 기우는 무례로 이어진다.
맞다. 위험한 현실이다. 사람들이 죽고, 스님이 사라지고 있다. 불안한 현실, 폭력적인 상황이 계속된다. 참여연대의 유엔 안보위 서한 발송과 이에 대한 우익의 반발은 한국사회를 더욱 깊은 테러의 상황으로 내몬다. 천안함 진실을 말하면 바로 좌파로 분류되고 ‘빨갱이’로 낙인찍힌다. 정권과 조중동은 북한을 집요하게 전쟁광으로 몰아세웠다. 권력은 늘 그랬듯이 월드컵을 활용코자 한다. 월드컵을 틈탄 기회주의적 정치공학.
지자체 선거로 확인된 정권심판, 4대강 반대의 여론은 묵살된다. 종편에 몰아주기 위한 텔레비전 수신료 인상 드라이브도 그대로 강행된다. 바로 지금 월드컵 기간 중의 일이다. 월드컵 기간 중 한국사회 권력의 동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리해지라.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축구 좋아하고 월드컵 즐겨 보는 사람들이 현실에 무관심해졌고, 진실로부터 눈 돌렸다고 단정하지는 마시라. 월드컵 열기를 ‘열광’으로 모는 자는 따로 있다.
월드컵을 찾고 월드컵을 즐기며 월드컵을 이야기한다고 환상에 빠졌고 타인의 죽음을 무시하며, 권력의 선전에 놀아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괜히 과장되게 해석하려 들지 말고, 또 미리 단정하지도 말라. 희한하지 않는가? 아무리 북한을 때려도 대중들은 북한을 응원한다. 정대세의 인간적 눈물에 감동한다. 다음날 피곤한 눈으로 생활현실로 돌아간다. 그런 슬기로운 팬들, 대중을 두고 괜히 잰 체 하면서 진단하려는 것은 말했듯이 실례다.